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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불멸의 "김마리아 선생" 대한민국과 결혼했다.

부자공간 2023. 3. 2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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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불멸의  "김마리아 선생" 나는 대한민국과 결혼했다.

김마리아(金瑪利亞)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상하이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다. 본관은 광산으로, 본명은 김진상(金眞常)이며, 김근포(金槿圃)라고도 하였다.

 

황해도 장연에서 지주인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3녀 1891년 6월18일 ~ 1944년 3월13일로 태어났다. 김윤방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운 선각자였는데,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했고, 김마리아의 집안은 민족 의식이 투철한 명문가였다. 김마리아의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의 아들인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김규식의 부인이며 역시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에게는 김순애가 나이 많은 5촌 종고모가 된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하교을 졸업한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류동렬,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김마리아는 숙부의 집에서 연동여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민족정신을 갖고 있는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를 거쳐 도쿄 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1919년 도쿄 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 · 8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곧이어 3 · 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이때 고문을 당해 몸을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난 사이,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의 진링(金陵)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파크대학교와 시카코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김마리아 선생은.... 출소 후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21년 8월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겼다. 독립운동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해 2.8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미농지에 베껴 기모노 허리띠에 숨기고 부산으로 들어온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안창호 선생과 함께 개막 연설을 했다. 안 선생은 이때 "김마리아 같은 동지가 10명만 더 있었다면 조선은 독립됐을 것"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김 선생은 이후 미국유학길에 올라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1933년 귀국했다.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잔혹한 고문을 당해 한쪽 가슴을 잃었고 평생 뼈에 고름이 차는 등 지병에 시달렸던 김 선생은 광복을 불과 1년여 앞둔 1944년 3월 13일 52세로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김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동양일보 -

 

https://youtu.be/9mbHuiAyF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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