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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의 전설적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의 삶과 일. 1

부자공간 2022. 11. 25.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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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의 전설적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의 삶과 일. 1

고인이 된 스웨덴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영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스크린 인물 중 한 명이다. 1915년에 태어난 그녀는 '카사블랑카' (1942년), '가스라이트' (1944년), '아나스타시아' (1956년)를 포함한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들에 출연했다. 그 과정에서 놀랍게 세 개의 아카데미 상, 두 개의 에미 상, 한 개의 토니 상, 네 개의 골든 글로브 상 그리고 BAFTA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영화, 텔레비전, 무대에 출연하는 사이에 잉그리드는 그녀의 경력을 거의 단절시킬 뻔한 선정적인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1982년 6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마에 결국 자신의 목숨을 빼앗겼지만, 오늘날, 그녀의 이름은 할리우드의 황금기로 또 로맨스, 범죄, 코미디와 같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영화 모음집으로 불리며 우리곁에 남아 있다. 출처: (전기) (가디언) (워싱턴 포스트)

 

어린 시절 : 잉그리드 버그만은 1915년 8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쥐스투스와 프리다 버그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겨우 세 살이었다. 생후 6개월 에 찍은 사진이다.

 

유년기 :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후, (사진 속 잉그리드는 기타를 치고 있다) 아버지에 의해 길러졌다.

 

포즈 취하기 : 전문 사진작가로서 저스틴은 1920년경에 찍은 이 사진과 같이 많은 사진안에 그의 딸이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연기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또 비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계속되는 비극 : 10대 초반에 잉그리드는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었다. 그녀는 결국 삼촌 가족의 보살핌을 받게된다. 젊은 여성으로 성장하면서 잉그리드 버그먼은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녀는 영화 '랜드스캠프'(1932)에서 무허가 엑스트라로 처음으로 스크린에 등장했다. 그리고 이듬해 스톡홀름 왕립연극극장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영화 데뷔 : 1934년 잉그리드 버그만은 영어로 '구시가지 백작'으로 알려진 스웨덴 코미디 '멍크브로그레븐'으로 영화 데뷔를 했다.

 

'인터메조' (1936) : 스웨덴에서 출연한 또 다른 영화에는 괴스타 에크만의 상대역인 '인터메조'가 있다. 영화 역사가들은 이 영화속에서 그녀의 재능이 빛을 발해 국제적인 배우 활동의 발판이 되었다고 얘기한다. (이 영화는 1939년 버그먼과 트레버 하워드와 함께 리메이크되는데, 이 작품이 그녀의 할리우드 데뷔작이다.)

'인터메조' (1936)
'인터메조' (1936)

 

페터 린드스트룀과의 결혼 : 1937년 7월 10일, 잉그리드는 치과의사 페터 아론 린드스트룀과 결혼했다. 부부는 딸 프리델 피아 린드스트룀을 낳았다. 그들은 1950년에 이혼했고, 버그먼은 20세기의 주요 할리우드 스캔들 중 하나에 휘말렸다.

페터 린드스트룀과의 결혼
페터 린드스트룀과의 결혼

 

'카사블랑카' (1942) : 초기 미국 영화 작업은 카사블랑카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험프리 보가트의 상대역인 '일사 룬드' 역으로, 그녀의 가장 유명한 역할로 이름을 올리며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른다. '카사블랑카'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화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카사블랑카' (1942)
'카사블랑카' (1942)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1943) : 아카데미가 '카사블랑카'에서 잉그리드의 연기를 간과하자, 많은 사람들이 놀랐는데, 마치 아카데미는 그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게리 쿠퍼와 함께 출연한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에 출연한 잉그리드를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렸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1943)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1943)

 

'가스라이트' (1944) : 이듬해 버그먼은 심리 스릴러 영화 '가스라이트'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조지 쿠코르가 감독한 이 영화에서 프랑스 배우 샤를 보이어가 공동 주연을 맡았다.

'가스라이트' (1944)
'가스라이트' (1944)

 

첫 오스카상 수상 :  잉그리드 버그먼은 제니퍼 존스로부터 '가스라이트'로 오스카상을 받으며 기뻐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했다.

첫 오스카상 수상
첫 오스카상 수상

 

'스펠바운드' (1945) : 이어진 출연 요청이 많아진 잉그리드는 그녀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1940년대에 많은 성과를 내었다. 다음 영화는 또 다른 심리 스릴러 영화 '스펠바운드'였다. 서스펜스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한 이 작품은 그녀가 그와 함께 한 세 번의 공동 작업 중 첫 번째 작품이었고, 다른 두 번의 작품은 '악명'(1946)과 '염소자리 아래서'(1949)였다. 스펠바운드'에서 그녀와 함께 출연한 배우는 그레고리 펙이었다.

'스펠바운드' (1945)
'스펠바운드' (1945)

 

'벨스 오브 세인트 메리' (1945) : 잉그리드의 다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작으로 뮤지컬 코미디 드라마 '벨스 오브 세인트 메리'가 있다.' 빙 크로스비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그녀는 골든 글로브상을 받았다.

'벨스 오브 세인트 메리' (1945)
'벨스 오브 세인트 메리' (1945)

 

'악명' (1946) : 히치콕의 스파이 누아르인 악명은 잉그리드 버그먼과 캐리 그랜트가 함께 출연한 작품인데, 비평가들에게 히치콕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제작 방식과 뛰어난 촬영 기법으로 찬사를 받았다.

'악명' (1946)
'악명' (1946)

'로레인의 조안' (1947) : 잉그리드는 연극에도 종종 출연을 했다. 1947년, 그녀는 브로드웨이의 '로레인의 조안'에 출연하여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다음 해에 그녀는 빅터 플레밍의 '잔다르크'의 역할을 다시 맡아, 또 한번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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