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정치. 사회. 정보. 문화. 철학. 연예. 여행. 영혼여행)

'수암종택(修巖宗宅)' 국가민속문화재 등극

부자공간 2022. 6. 30. 00:01
728x90
반응형

수암종택(修巖宗宅)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 국가민속문화재 등극

한국에서 명문가라고 할 때 과연 그 자격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조건은 그 집 선조 또는 집안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How to live)' 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꼭 벼슬이 높아야 명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진선미(眞善美)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정승 셋보다 대제학 한 명이 더 귀하고 대제학 셋보다. 처사 한 분이 더 귀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았는가? -명문가 이야기에서-  철종 9년(1858) 6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67세에 공조판서, 70세에 좌의정이 되는 늦은 환로(宦路)에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까지 이른다. 그가 79세에 죽자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로 인해서 이 집은 더 유명해졌다.
  

뉴스는 ▶ 수암종택(修巖宗宅)류성룡(1542~1607)의 셋째 아들 류진(1582∼1635)이 마련한 터에 그의 7대손 류후조(1799~1876)가 지은 건물이다. 자리는 속리산·팔공산·일월산의 지맥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이 합류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이다. 류성룡의 수제자인 상주 출신 정경세(1563~1633)가 집터를 정해줬다고 전해진다. 건물을 세운 류후조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인 백비탕(白沸湯)으로 유명하다. 녹봉이 떨어졌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놋그릇에 담아 정성껏 대접해 예를 다했다고 한다. 수암종택은 안채를 중심으로 녹사청(錄事廳)과 사당이 조성됐다. 사랑채와 연결된 안채는 경북 북부지역의 건축적 특징이 반영된 'ㅁ'자형 평면이다.

 

일반적인 고택과 달리 대청 우측 마루방 지면을 들어 올려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를 꾸몄다. 'ㄴ'자형 평면의 녹사청은 류후조가 봉조하(奉朝賀·종2품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를 제수받고 녹봉을 지고 오는 관리를 맞거나 묵게 할 용도로 건립했다고 추정된다. 문화재청 측은 "민간에 녹사청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며 "청백리 집안답게 별다른 장식 없이 소박하나 당시 사회구조의 이해를 돕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전했다.사당은 안채 뒤편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지금도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큰 공훈이 있는 이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락해 지내는 제사), 기제사(忌祭祀·해마다 사람이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 등이 전승된다. 문화재청 측은 "안채 대청 상량묵서에서 건립연대(1858)가 명확히 확인되고, 녹패·문집 등 고문헌과 가마·관복 등 민속유물까지 잘 보존돼 조선 중후기 상류 주택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죽병(대나무 병풍)은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머물러 후일을 도모하며 그렸다고 알려졌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류후조는 남인계 중용책에 따라 이조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차례로 지냈다.■

수암종택(修巖宗宅)
수암종택(修巖宗宅)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