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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5인 "이회영, 안중근, 유관순, 김원봉, 조지 쇼우" 덕분에

부자공간 2023. 4. 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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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5인 "이회영, 안중근, 유관순, 김원봉, 조지 쇼우" 덕분에

이회영(李會榮) ▶ 1867년 ~ 1932년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가이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로 가담하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1931년에는 흑색공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인하여 옥사하였다. 

 

안중근(安重根) 안중근(安重根) 1879년 ~ 1910년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다.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瑪利亞)의 맏아들로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 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안중근은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유관순(柳寬順) ▶ 1902년 ~ 1920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의 3.1 독립운동 시작된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뤄진 모진 고문으로 인해 1920년 9월 28일 순국했다.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1916년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인 사애라시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고,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했다. 3월1일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 휴교령으로 천안에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김원봉(金元鳳) ▶ 일제강점기의 의열단장이자 난창에서 중국공산당에 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며 정치인이다. 1898년 ~ 1958년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경남 밀양에 의열기념관이있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고 황푸 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에 의열 기년관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경상도 지역에 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1946년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인민공화당 위원장 역임, 김구와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이로 인해 김일성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남파활동을 하면서 1954년 1월 25일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다.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여 1958년 10월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로 대의원 권한이 박탈되었고, 체포되었다고 한다.

 

조지 쇼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으나 후손을 찾지 못해 수여되지 않았다가 50년 만에 쇼의 핏줄이 호주에 살고 있음이 확인,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행사에 손녀 마조리 허칭스와 증손녀 레이첼 서시를 초청하였고 2012년에 친손녀인 마조리 허칭스(Majorie Hutchings)에게 수여되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아일랜드에서 1919년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해 우리나라에 3.1 운동도 일어났는데 조지 쇼는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그해 7월부터 자회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설치해 임시정부와 국내 사이의 연락책을 수행하며 무기 운반, 군자금 전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계림호라는 군수지원함의 함장을  맡고, 1919년 일제가 회유를 위해 남작 작위까지 수여한 김가진의 임시정부로의 망명을 도왔으며, 같은 해 11월 대한제국의 황족인 의친왕 망명 계획에도 동참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920년 7월에 일본 정부는 그를 계획적으로 소위 내란죄의 명목으로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그 후 4개월 만인 1920년 11월 19일에 영국 정부의 강력한 요구로 보석으로서 석방된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있었지만, 조지 쇼 체포에 관해 영국의 항의가 빗발쳤고 자칫하면 조지 쇼 체포 문제가 영국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1943년 11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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