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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 풍요한 집터 ‘사의재(四宜齋)’

부자공간 2022. 7. 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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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 풍요한 집터 ‘사의재(四宜齋)’

좋은 글을 소개해 주거나 알려주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도 정보도 얼여주는 고마운 일이다. 동아일보에 난 다산(茶山)에 관한 좋은 글을 올려주신 분께 감사드리면서 평소 좋아하는  다산(茶山)에 관한 글이라 눈에 바로 들어왔다. 다산은 많은 사람들이 남달리 생각하는 분이다. 백련사 다산초당(茶山艸堂)등 알고 있고 많이 들어본 곳이고 한 번쯤 간 곳이지만... 듣는 순간 운치와 정감이 느껴지는 감정은 다산(茶山)이기 때문이다. 다산과 초의선사... 초의선사는 강진에 유배온 다산에게 배우기도 했다는 것이다.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과 초의집(草衣集)이 있다. 

 

동다송(東茶頌) 차나무에 하늘이 내린 신령스러운 나무라고 하고있다. 그래서 제상(祭床)에 올리는 신물(神物)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차나무는 귤나무처럼 군자의 덕을 가지고 있으며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고 옮겨가지 않는 것에서 영원한 믿음과 정절을 상징한다고 강조한다. 매서운 눈보라에 굴하지 않고 늘 푸른 것이 선비의 충절을 또 모진 추위에도 끄떡하지 않는 흰 꽃은 강인한 순결과 백의민족을 암시한다. 다산과 초의선사는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자연을 인간의 삶에 비교해서 그 자연을 즐기는 풍류 가이다. 지금 시대에  ‘사의재(四宜齋)’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 우리가 가슴에 한번 더 생각하는 명언이다. 오늘 도시 멀리서 잊어버리고 있던 다산의 ‘사의재’ 정보를 보고...

  

동아일보에 소개된 ▶ 배부른 황소가 한가로이 엎드린 채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와우형(臥牛形) 터에서 지내봤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전남 강진에서 첫 유배 생활을 했던 ‘사의재’ 옆 한옥체험관, 바로 황소 얼굴에 해당한다는 터다. 이름 그대로 넉넉한 터 기운 때문일까. 다산의 자취가 밴 강진을 여행하는 동안 몸이 평안해지고 마음은 여유로웠다. 221년 전인 1801년 겨울, 전남 강진 땅을 밟은 다산은 깊은 나락에 빠져 있었다. 임금(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다가 졸지에 ‘천주쟁이’라는 역적으로 낙인찍혀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강진읍내 동문마을에 사는 주막집 주모만이 다산에게 음식을 내주었다. 허겁지겁 아욱국에 밥을 말아먹는 다산을 가엽게 여긴 주모는 골방까지 내주며 머물도록 했다.

▶ 주모는 지혜도 깊었다.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비수 같은 충고를 던졌다. 다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마음을 다잡아 후학을 양성하며 ‘경세유표’ 등 위대한 실학 저서들을 집필하게 된 것은 주막집에서의 이런 사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다산은 주모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4년간 머문 주막집 당호를 ‘사의재(四宜齋)’라고 지었다.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문구이기도 했던 ‘사의재’는 후대에 역사적 명소로 탄생하게 된다. 

다산초당

▶ 사의재를 낀 동문마을에는 명당임을 알려주는 표식이 있다. 한옥체험관 입구에 있는 ‘동문샘’이라는 우물이다. 푯말은 샘을 풍수적으로 설명해놓았다. 이에 따르면 보은산 우두봉(牛頭峰) 자락 아래 강진읍성으로 둘러싸였던 강진읍은 전체적으로 와우형 터에 해당한다. 읍성 4대문 중 하나인 동문 쪽 샘(東門井), 즉 바로 이곳은 소의 왼쪽 눈이라는 설명이다. 소의 오른쪽 눈인 서문 쪽 샘(西門井·서성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다산은 1805년 겨울 사의재를 떠나 우두봉 기슭의 고성사(高聲寺·당시는 고성암)에서 머물게 된다. 친분을 맺은 백련사 주지 혜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강진 시내가 굽어보이는 이곳에서 다산은 ‘보은산방’이란 간판을 내걸고 장남(학연)과 강진읍 6제자를 대상으로 ‘주역’ 등 학문을 가르쳤다. 사의재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의 고성사는 현재 ‘수국 길’ 산책 코스로 유명하다. 그런데 현지 사람들은 고성사의 저녁 종소리(高庵暮鐘·고암모종)를 더 높게 친다. 고성사가 황소의 귀밑 혹은 목방울을 매다는 부위에 해당하는데, 이곳에서 소리가 울려 퍼져야 강진이 발전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높은(高) 소리(聲)’라는 뜻의 고성사는 실제로 ‘소리 명당’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남도의 판소리 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득음(得音) 장소 중 하나로 꼽혔다.

비밀의 길 대나무숲


다산은 겨울 한철을 고성사에서 보낸 후 제자의 집을 전전하다가 1808년 만덕산 자락 아래 다산초당(도암면 만덕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방대한 저서를 완성했다. 사실 다산은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풍수지리를 강하게 부정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와우형 명당에서 기운을 차리고 마침내 자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전남 강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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