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정치. 사회. 정보. 문화. 철학. 연예. 여행. 영혼여행)

'일왕(日王)'을 암살하려다 순국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독립운동가

부자공간 2023. 3. 15. 10:45
반응형

'일왕(日王)'을 암살하려다 순국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독립운동가 선정

일왕을 암살하려다 체포돼 옥중 순국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독립운동가로 선정하다. ‘5월의 독립운동가’에는 일본인 2명이 선정됐다. 박열 선생의 배우자로 조선 독립을 위해 일왕을 암살하려다 체포돼 옥중 순국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독립운동가를 변론한 후세 다쓰지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 된 일본인 독립유공자. 또한 박열의 아내이다. 한국명은 박열의 성에 후미코를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읽은 '박문자'이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틀 만에 치안 경찰법에 근거한 예비 검속으로 남편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다이쇼 덴노와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의문사하였다.하였다.

 

후미코는 1920년 7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계속 사회주의 책과 잡지를 탐독했으며 1921년 여름 유학과 기타 이유로 도쿄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교류를 시작하였다. 1921년 11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던 이와사키(岩崎) 오뎅집의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1922년 3월 후미코는 박열과 만났고 5월부터 동거를 시작했으며 동거남 박열을 따라 박열이 조직한 사회주의자 모임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다. 11월에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대담한 조선인(太い鮮人)>이라는 운동지를 발간했다.

1923년 4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하였는데 3월부터 살던 도쿄의 집을 본거지로 정하고 5월 27일에 불령사 첫 모임을 가졌다. <대담한 조선인>을 '현사회(現社會)'라는 제목으로 바꿨고 후미코는 이 잡지에 계속 글을 실었다.

 

6월에는 당시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였던 모치쓰키 가쓰라와 가토 가즈오의 강연회를 열고 일본의 노동운동가인 나카시니 이노스케의 출옥 환영회도 개최했다.

 

그러나 박열이 이전부터 은밀히 추진했던 폭탄 입수를 둘러싸고 김중한과 박열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령사는 점점 갈등이 커지게 되고 같은 시기 흑우회가 해산되자 니야마 하쓰요와 김중한은 불령사를 나와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후미코는 박열과 예비 검속을 핑계로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수사 도중 폭탄 입수 계획이 밝혀지자 일본 당국은 대역죄 위반으로 두 사람을 기소하였다.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한 박열은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어로 "나는 박열이다"고 답했으며 후미코 또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박문자"라고 말한다.

 

1926년 3월 26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지만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다. 4월 5일 천황이 명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며 두 사람이 옥중 결혼을 하면서 후미코는 박열의 호적에 들어갔다.

이후 후미코는 우츠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7월 23일 23세에 의문사하였다. 일본은 후미코 추모 열풍이 불 것을 염려하여 후미코의 어머니와 동료들을 검속하기도 했다. 법적으로 후미코는 박열의 아내였기에 조선에서 박열의 형 박정식이 와서 후미코의 유해를 모셔가려 했지만 일본제국 경찰은 유골을 직접 주지 않고 조선의 경찰서로 보냈다.

 

경찰서에서 유골을 인수받은 박정식은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후미코를 매장하였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광복 이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으며 한국인 여성과 재혼했지만 이후에도 일찍 죽은 그녀를 잊지 않고 후미코의 기일마다 집안 내에서 묵상을 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가졌다고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