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정치. 사회. 정보. 문화. 철학. 연예. 여행. 영혼여행)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와 엘레나'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 부부"의 통치

부자공간 2023. 8. 14. 06:31
728x90
반응형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와 엘레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 부부"의 

차우셰스쿠 루마니아와 엘레나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 부부의 최후

사형 집행 이후,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신은 공동묘지 구석에 처박힌 채 묻혔다. 원칙상 유럽식 무덤은 대리석으로 만들고 장식까지 하지만, 차우셰스쿠 부부의 무덤은 그냥 흙으로만 대충 만들었다. 그 주변에는 잡초와 나무만 가득할 뿐이다. 비석도 당장 세워지지 않았는 데다가 함께 묻히는 것도 불허돼서 50m쯤 떨어진 각자 무덤에 매장되었다.

 

1986년 부쿠레슈티 거리에 내걸린 차우셰스쿠 선전 포스터. 차우셰스쿠의 70세 생일 및 정치 활동 55주년 기념 우표 발행등 국민을 속이는 별짓을 다해도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풍족한 농업 국가였던 루마니아는 현실을 무시한 차우셰스쿠의 무리한 공업화로 인해서 경제가 파멸하여 많은 부채를 지게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엄청나게 불어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하여 농산물과 공산물을 대량으로 수출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수입을 규제하는 정책을 병행했다.

 

부인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욕심이 많고, 사치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데 열중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의 통치에 대한 비판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그녀는 루마니아의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치인이다. 1974년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직분에 대통령직을 추가하여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차우셰스쿠는 외교 정책으로는 중소 분쟁 때 중화인민공화국과 옛 소비에트 연방 중 어느 한 편에 가담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걸었지만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화에는 탄압하였다.

 

그는 민중들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 정치를 하였다.

 

차우셰스쿠는 "어버이 수령"이나 "민족의 태양"으로 인식하게 해 인민에게 존경받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의 방식을 모방해 "지도자"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을 개인 숭배 대상으로 발달하게 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 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김일성과 같은 민족 전설이 없었다.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의 독재 방식을 루마니아 국민에게 적용한 것은 중대한 실수로 여겨진다. 자신을 "어버이 수령"으로 인식하게 해 권력을 유지한 김일성의 왕조스러운 독재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유교 사상에 익숙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제한스러우나마 민주주의 경험이 있었고 공동체를 향한 헌신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문화가 비교적 강한 루마니아인들에게 이와 같은 독재 방법은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차우셰스쿠는 동구권 국가인 루마니아 국가원수였지만, 다양한 국가와 외교를 펼쳤으며 서구권 국가와의 외교도 전개했다. 특히 차우셰스쿠는 일본의 쇼와 천황과 일본 총리대신 미키 다케오와 회담했다.

 

차우셰스쿠는 스페인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를 만난 적 있고 콜롬비아의 대통령인 미사엘 파스트라나를 만난 적도 있었으며, 미합중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를 만나기도 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황제인 장베델 보카사를 만나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비밀경찰 고위 관리 이온 미하이 파체파가 서방으로 망명한 후 자신을 배신할까 봐 두려워했고 이에 배우자인 엘레나 차우셰스쿠를 비롯한 자신의 일가족은 물론 자신의 처가 식구들까지 행정부 요직에 앉히는 족벌 정치를 하였다.

 

특히 그의 부인 엘레나는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서열 2순위였다. 엘레나의 형제들도 요직에 있었는데 오빠 마린은 빈 주재 루마니아 경제국장을 맡았고 남동생 안드루타는 비밀경찰 총책임자를 맡았으며 다른 남동생 일리에는 국방부 차관을 역임했다차우셰스쿠의 차남 니쿠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권력 후계자로서 간주되어 왕자로서 군림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며느리를 학생 친위대 책임자로 앉히는 등 일가친척 사십여 명을 루마니아 행정부와 루마니아 공산당 요직에 임명하는 족벌 정치를 벌였다.

 

차우셰스쿠의 정치는 심각한 공포 정치로 여겨졌다. 특히 도청을 통한 불만세력 색출을 통해 국민들을 행동과 말 모두 통제했다. 당시 루마니아에는 인구 22천만 명이었는데 각 도시 및 마을에 300만 개의 도청기와 천여 개의 도청 센터가 설치될 정도로 빈틈없는 감시 때문에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 국민들은 집안에서 조차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린이들의 동심(童心)을 국민 감시에 악용하기까지 했는데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학부모가 한 이야기를 토론 수업을 빙자해서 수집하기까지도 하였다. 물론 그가 수집된 이야기 중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담긴 내용은 상부에 보고되었으니 상당히 교묘한 감시 방법이었다.

 

또한 그는 세쿠리타테라고 불리는 친위조직을 두고 있었다. 세쿠리타테는 차우셰스쿠의 충복(忠僕)인데, 차우셰스쿠는 고아 출신인 세쿠리타테 요원들을 어려서부터 훈련시켜 자신의 친위조직으로 만들었다. 세쿠리타테 요원들은 암살, 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맡고 있어서 차우셰스쿠의 독재정권이 유지되게 한 밑바탕 중 하나였으며 정규군 장군들 못지않은 권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쿠리타테는 크게 비밀경찰과 보안군으로 구분되었으며 이들 중 비밀경찰은 정보수집과 암살을 담당했다. 다른 국가에서는 정규군이 우세했지만, 루마니아의 경우는 세쿠리타테가 우세했다.

 

그는 루마니아 정규군은 전혀 신뢰하지 않고, 차우셰스쿠의 충복들 중 자신의 지지자만 뽑아다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비밀경찰과 보안군을 조직했다. 친위군 역할을 맡던 보안군들에게는 정규군에게는 주어지지 않던, 최신 장비와 높은 보수가 주어졌다.

 

이러한 원인은 훗날 반정부 시위에서 그대로 드러났고, 시위를 진압하고자 하는 보안군과 이에 맞서는 정규군과의 대립이 드러나 내전의 위기로 번졌다. 민주화 이후에도 보안군의 영향력은 남아 있었고, 이들을 뿌리 뽑고자 하는 데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하지만 차우셰스쿠 루마니아와 엘레나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 부부 그들의 최후는 사형으로 이어졌다.

 

https://youtu.be/4pc-enhIm7M?si=tTaj1cXE0FVu9hEl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