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의 역사는 이러한 선입견을 확인시켜준다.
일반적으로, 고아원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한 이미지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가련함으로 알려졌든, 사악한 교장선생님으로 알려졌든, 가난하고 궁핍한 아이들로 붐비는 것으로 알려졌든 간에,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겠다는 그들의 고귀한 목표에는 부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고아원의 역사는 이러한 선입견을 확인시켜준다. 대부분은 선의의 자선가나 종교 단체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어리고 버려진 아이들에게 행복의 기억같은 것은 남기지 않았다. 출처: (Ranker) (Insider) (ThoughtCo)
고아원의 역사 형태야 어찌 되었던간에 몇 천년 동안 부모를 읽은 아이들은 보살핌을 받아왔다. 기원전 4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토는 '고아들은 공공의 보살핌을 받아야한다.' 고 주장했다. 그 후로 보살핌은 종교시설, 사적인 자선 기관, 공적인 정부 기관, 그 중간 어딘가의 시설들로 대체되며 이어져 왔다.
최초의 고아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고아원은 기원후 400년경 고대 로마에서 문을 열었다. 이러한 기관들이 문을 열기 전에는 원치 않는 아이들은 버려져 노출되었고, 보통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374년경에 이 관습이 불법화되자, 아이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고아원에 보내지게 되었고, 보통은 나중에 팔리게 되었다.
파운들링 병원 최초의 제대로 된 고아원인 파운들링 병원은 1739년 영국의 자선가 토마스 코람(사진)에 의해 지어졌으며, 세계 최초의 완전한 자선 기관 중 하나로 여겨진다.
연습용 아기들 1739년 이래로 고아원의 역사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20세기 전반 미국의 대학들은 지역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장기간 빌려 가정 경제학이나 "가정주부공예" 수업의 소품으로 사용했다.
연습용 아기들 이러한 "연습용 아기"들은 12명 정도의 학생들로 구성된 교대 팀에 의해 길러지고, 모두 교대로 모성애의 다양한 교리를 연습했다. 그 당시에 학생들과 유아들 모두에게 윈-윈 상황처럼 보였던 것은 실제로 쇠약한 정서적 이탈을 가진 아이들 세대로 이어졌다. 연구에 따르면 대학에서 자란 아이들은 정서 발달에 필요한 초기의 애정 접촉을 박탈당했고, 어린 시절 그렇게 차갑고 계산적인 학생들의 품에서 품으로 전해진 후에는 결코 한 사람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없었다.
도메콘 가족 코넬 대학에서, 이 모든 아이들은 법적으로 "가정 경제학"의 줄임말인 "도메콘"이라는 성을 받았다. 한때 이 도메콘 아이들이 전국적으로 엄청난 수에 달했지만, 그들 중 극소수는 그들이 고아원이나 친지에게 보내지기 전에 대학생들의 손에 안겨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의 소외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하며 그들의 삶을 보냈다.
아이들 보호의 어두운 단면 고아원의 초창기 시절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진정한 악의가 아니라 선의의 무지에서 나온 것들이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소름끼치는 착취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영리 고아원 개인 고아원의 출현은 많은 계획적인 사업가들에게 수익성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북미에서 유럽과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리 목적의 고아원들은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모아 끔찍한 환경에 방치해 동정심으로 기부금을 얻었으며, 아이들은 가장 높은 입찰자들에게 팔아넘겨졌다.
아동 노동 많은 초기 고아원들은 들어온 아이들을 즉시 일터에 투입했다. 18세기 영국의 다양한 노역장에서부터 심지어 21세기 초의 노동 고아원까지, 아동 노동은 고아원의 역사에 오랫동안 오점이 되어왔다.
고아를 태운 기차들 그러나, 그런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서부에서 떨어진 아이들의 대부분은 자유 노동을 찾는 농부들과 사업체들에게 팔렸다. 입양인들의 동기는 거의 조사되지 않았고, 그들 자신도 거의 항상 그들의 아이들을 더 나은 삶으로 보내고 있다고 믿는 가난한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다.
조지아 탄과 테네시 어린이 가정 협회 고아원 역사상 가장 불길했던 사건 하나는 테네시 아동 가정 협회의 아기 납치와 암시장 입양 계획의 배후에 있던 장본인 조지아 탄과 관련이 있다. 크럼프라는 이름의 부패한 멤피스 정치인의 지원을 받은 탄은 가난한 집에서 아이들을 구하고 더 나은 삶을 주고 싶다는 구실로 거리와 뒷마당과 현관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납치했다.
조지아 탄과 테네시 어린이 가정 협회 탄은 자신의 고아원을 사람들을 위해 개방했고, 어떠한 종류의 신원 조사도 하지 않고 그녀의 '관리' 아래 있는 아이들을 최고 입찰자들에게 보여주고 팔았다. 이 협회의 행복하고 건강해보이는 외관 뒤에, 아이들은 끔찍하고 학대적인 환경에 갇혀 있었다. 아기들은 긴급한 치료를 받지 못했고, 많이 울면 혀를 입 바닥에 묶어 두었다. 1950년에 5,000명 이상의 아이들을 납치한 후 체포되지 않고 사망했다.
루마니아 고아들 1960년대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에서 여성들이 최소 4명의 아이를 낳거나 40세가 될 때까지 모든 피임과 낙태를 금지하는 매우 공격적인 국가 정책을 제정한 후, 유럽에서 가장 큰 고아들의 위기를 촉발시켰다.
루마니아 고아들 1970년대까지, 여성과 부부들은 심지어 아이를 낳지 않은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받았다. 어쩔 수 없이 낳은 아이들을 돌볼 수 없었던 압도적으로 가난한 하층민과 중산층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낼수 밖에 없었고, 1989년 공산주의 정부의 붕괴 후 이미 10만명에 가까운 고아들로 루마니아의 이미 노후화된 고아원 제도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오늘날의 고아원 오늘날, 고아원의 개념은 반복적으로 검토되어 왔다. 많은 곳이 '고아원'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보육시설은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흔하다. 많은 기관들이 이제 위탁 보호, 빠른 입양, 돌봄 센터에서의 장기 체류에 대한 다른 대안의 이점을 강조한다.
고아원의 으스스한 이야기 이처럼 어둡고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도시의 구설들과 으스스한 이야기들의 모음이 이 음습한 기관들의 벽에서 새어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들은 역사속 고아원들의 사악한 비밀들 중 몇 가지에 불과하다.
세인트 존스 고아원 굴번에 있는, 호주 세인트. 존스 고아원은 1913년에 문을 열었고 가혹한 처벌과 심각한 편의시설 부족으로 빠르게 알려지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주 사소한 범죄에도 매질을 당했고, 200명의 소년들을 위한 화장실은 두 개로 제한되었다.
세인트 존스 고아원 세인트 존스는 1978년에 마침내 문을 닫았지만, 지역의 구설들은 그 고아원이 결코 버려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많은 방문객들은 소년들이 노는 소리를 듣고 심지어 고아원 구내에서 유령을 본다고 보고했다.
몬태나 어린이 센터의 사라져간 묘비들 몬태나주 트윈 브리지스에 지어지고 1894년에 문을 연 몬태나 어린이 센터는 광산 붐이 끝날 무렵 가난이 서부를 휩쓸면서 빠르게 많은 수의 어린이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몬태나 어린이 센터의 사라져간 묘비들 그 시대의 많은 타 고아원들처럼, 그곳의 아이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적절한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고, 가혹한 처벌에 직면했다. 몬태나 어린이 센터는 또한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고아원의 많은 아이들이 질병으로 죽었고 땅에 묻혔다. 한 전직 관리인은 한 지점에 30개 이상의 묘비가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불가사의하게 사라졌다. 오늘날 그 장소를 방문할 만큼 용감한 사람들은 지금은 폐쇄적인 건물에서 아이들이 노래하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리버풀 시멘스 고아원 리버풀 시멘스 고아원은 1869년 리버풀 최초의 고아원으로 문을 열었다. 이 고귀한 이름은 금세 시들해졌다. 고아원의 관리인들은 다락방 벽에 늘어선 비좁고 창문이 없는 사물함인 "버릇없는 찬장"이라고 불리는 장에 아이들을 가두는 것으로 유명했다.
리버풀 시멘스 고아원 그 후, 1950년대에, 그 고아원은 문을 닫았고 정신병동으로 전환되었다. 이 역시 나쁜 평판을 얻었다. 오늘날, 건물은 건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한 어린 소녀의 유령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어 있다.
거스리 소년의 집 오클라호마의 거스리 소년의 집에는 사악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교직원 간호사 중 한 명은 그녀가 돌보던 수많은 소년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또 다른 직원은 종탑에서 목을 매 숨졌다고 한다.
거스리 소년의 집 오늘날, 거트리 소년의 집의 안뜰을 방문할 만큼 용감한 사람들은 종탑의 희미한 종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보고한다.
국립 군인 고아원 미국 남북 전쟁 동안 전사한 북군 병사들에 의해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버지니아주 게티즈버그에 고아원이 세워졌다. 국립 군인 고아원은 한동안 조심스럽게 운영되었지만, 로사 카마이클 한 명이 부임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국립 군인 고아원 카마이클은 학대적인 철권통치를 했으며, 정기적으로 자신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을 과도한 폭력으로 처벌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한 아이가 그 지옥 같은 곤경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당국에 신고했고, 당국은 카마이클에게 그녀의 학대에 대해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녀의 희생자들의 성난 영혼들이 고아원 건물들의 홀들을 괴롭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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